광둥성(广东省)
성도- 광저우(广州)
인구- 7,859만(2002)
면적- 18만㎢

행정구역
21개 지급시(地级市),23개 현급시(县级市), 41개 현(县), 3개 자치현(自治县), 5개 향(乡)
경제특구-션쩐(深圳), 주하이(珠海), 샨터우(汕头) 등

위치
중국 남동쪽 주강(珠江) 삼각지에 위치, 서쪽은 광시좡족자치구(廣西壮族自治区), 북쪽으로 후난(湖南)성과 장시(江西)성이 있으며 북서쪽으로 푸젠(福建)성과 인접하고 있다.

지형적 특색
산지·구릉이 70%, 평야가 30%를 차지하며, 북부의 난링산맥(南嶺山脈)은 양쯔(揚子)강과 주강의 분수령을 이룬다. 주강은 둥(東)강, 시(西)강, 베이(北)강의 3대 지류로 이루어지며, 광저우 부근에서 합류하여 규모가 큰 삼각주를 형성한다. 앞바다에는 중국 제2의 섬인 하이난따오(海南島)와 둥샤(東沙), 중샤(中沙), 난샤(南沙) 등 군도를 이루는 170여 개의 섬이 산재한다.

기후
북회귀선이 본 성의 중앙부를 지나며, 중국에서 위도가 가장 낮다. 연평균 기온이 23℃내외이며, 강수량은 1,500mm이고, 5~11월간 자주 태풍이 분다.

역사
광둥성은 화남(華南) 경제권의 발전을 주도해 온 핵심이 되는 성으로, 그 위치관계로 남쪽으로부터 진출해 온 서구(西歐)세력에 가장 먼저 접촉하여, 일찍이 중국의 선진지역이 되었으나, 동시에 영토적인 희생도 입었다. 즉, 아편전쟁 이후, 1842년에 홍콩(香港)섬, 60년에 주룽(九龍)이 영국에 할양되고, 98년에는 주룽반도 전역이 영국의 조차지(租借地)가 되었으며, 1887년에는 마카오(澳門)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다. 프랑스가 1898년에 조차하였던 광저우만(廣州灣)은 1946년에, 홍콩과 마카오는 1997년, 1999년에 각각 중국에 반환되었다.

산업과 경제
농업은 전반적으로 쌀의 2기작이 이루어져서,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중국 제1위이다. 상품작물로는 사탕수수, 황마(黃麻), 담배가 재배되고, 주강 삼각주에서는 양잠이 성하다. 또, 감귤류·바나나·파인애플·여지(려枝) 등 열대·아열대 과일의 생산이 많고, 하이난섬에서는 고무·야자가 생산된다. 산지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연안에서는 어업이 성하여, 자포(閘坡) 등 많은 어항이 있다. 또 담수어(淡水魚)의 양어가 성하고, 루이저우반도(雷州半島) 해안에서는 천일제염이 성하다. 한편 남중국해의 여러 섬에서는 전복 생산량이 많다.
  지하자원은 난링 산지와 성의 서부에 많이 매장되어, 철·망간·텅스텐·안티몬·주석·유모혈암(油母頁岩) 등이 풍부하다. 공업은 광저우를 중심으로 철강·기계·비료 등 중화학공업이 건설되고, 각지에 제당·제지·방직·식품공업이 발달하였다.


교통
육상에서는 징광(京廣)철도에 의해 화중(華中)·화북(華北)에 이어지고, 광주(廣九)철도에 의해 홍콩이 자리한 주룽반도(九龍半島)에 연결된다.
  주강 수계는 중국에서 양쯔강 다음 가는 주요내륙수로로, 각 지류가 모두 수운(水運)이 성하고, 도시는 대개 하항도시로 발달하였다. 광저우는 해륙교통의 요충을 차지하여 화남의 정치·경제·문화의 대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기독교 역사 및 현황
1581년 천주교예수회의 구리어리와 마테오리치가 마카오를 거쳐 광둥성 자오칭(肇庆)에 들어와 교회를 세우고 전도하였다. 1807년에는 런던선교회의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가 광저우에 도착, 제한된 곳에서 숨어서 중국어 신약성경을 번역했던 선교의 흔적이 깊은 곳이다. 이로부터 침례회, 런던선교회, 영국 장로회, 북미 장로회 등에서 꾸준히 광둥을 전초기지로 삼아 중국선교의 열기를 뿜기도 했다.
  1951년 린시엔까오(林獻羔) 목사가 집회를 연 따마잔(大馬站)교회는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가정교회이다.

관문도시- 광저우(广州)
면적- 16,000㎢
인구- 612만
지역- 주강 삼각주 북부에 위치하는 도시로서 주강의 둥강, 시강, 베이강의 3대 강이 합류하는 지역

역사
중국에서도 가장 오랜 도시이자 광둥성의 중심도시인 광저우는 천 년 이상 중국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해오고 있다. 바다와 가까운 지리적인 여건으로 인해 일찍부터 외부지향적 도시로 발전했다. 광저우에 외국인들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2세기경으로, 인도인과 로마인들이 이곳에 왔던 것으로 보이며 그 후 500년 뒤인 당나라 때에는 아랍상인들이 이곳과 중동, 동남아시아 일대에 대규모 무역활동을 벌였다.
  영국은 1625년 무역통상에 실패한 이후, 1685년 중국황실의 허가로 인도만을 근거지로 하던 영국 소속의 동인도 회사 배들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아편전쟁이 발발하여 중국의 역사 중 가장 충격적이고 큰 사건을 맞게 된다.
  광저우는 중앙정부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일찍이 서양 문화의 영향을 받아들여 반봉건적 자유사상이 강한 곳이다. 수세기 전부터 남쪽 사람들은 자신들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들로 인식되었으며, 중앙과 멀리 떨어져 그들의 독립적인 생활을 오랫동안 영위해왔다. 역사에서의 저항정신은 이제 경제에 대한 독립의지로 나타나고 있는데, 중앙정부의 통제에 머물지 않고 자신들의 독립적인 의지와 주장을 펼치고 있다.

교통
광저우와 베이징(北京)을 잇는 징광(京廣)철도와 광저우와 하이커우(海口)를 이어주는 광커우(廣口)철도, 그리고 광저우와 마오밍(茂名)을 잇는 광무(廣茂)철도가 이곳에 집결된다.

산업과 경제
주강 삼각주와 태평양에 인접해 있어 농작물과 수산물이 풍부한 지역이다. 경공업의 비중이 높아 식품, 방직, 제지 부문에서 상하이, 톈진(天津), 베이징 다음으로 4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외에도 대외무역이 발달한 무역중심지로서 매년 중국수출품교류회(中國出口商品交易會)가 연 2회 개최되고 있다. 시의 동쪽 15㎞지점엔 국제 상업항구인 황포항이 있어 대형 원양화물선 및 컨테이너선의 출입이 빈번하다.


기독교 상황
1557년 근처 마카오에 근거지를 둔 포르투갈인들과 함께 예수회 선교사들이 들어왔는데, 이들은 1582년 광둥성 서북쪽에 잠시 체류하다가, 베이징의 황실로 진출한 후 장기간 머물렀다. 1807년 중국 최초의 선교사였던 런던 선교회의 로버트 모리슨이 이곳에서 신약성경을 번역했으며, 그 후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와 활동을 했었다. 지금은 1951년 문을 연 따마잔교회가 바로 이곳 광저우에 있다. 그동안 이곳을 통해 많은 신앙서적이 유입되고 중국 대륙의 영적 필요를 채워주었지만, 최근엔 종교 활동에 대한 규제가 엄격하여 가정교회는 계속적으로 많은 타격을 받고 있다. 광저우시 공단에는 돈을 벌기 위해서나 공부하러 온 많은 젊은이들이 있는데, 오랫동안 발달된 경제로 인하여 신앙에 대한 갈급함이 옅어져 가고 있다. 이 곳 광저우는 그 어느 지역보다도 도시선교, 직장선교, 캠퍼스 선교의 필요가 절실한 곳이다.

관문도시-션쩐(深圳)
면적- 2,020㎢(이 중 327.5㎢가 경제 특구지역)
인구- 350만(2/3 이상이 외지인)
지역- 홍콩과 마주보고 있으며 홍콩 구룡반도의 뿌리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원래는 어업을 주요 생계 수단으로 하는 인구 2만 정도의 조그만 촌락이었다. 그러다가 1979년 중국 정부의 개혁 개방 정책에 따라 4개 경제 특구의 하나로 지정되고,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심천은 비약적인 발전과 반환의 계기를 맞게 된다.

기후
연평균기온은 22.4℃의 아열대 기후로, 최고 36.6℃에서 최저 1.4℃정도이다. 연평균 강우량은 1948.4㎖이며 해양의 다습한 공기가 산에 가로막혀 큰 폭우는 오지 않는 편으로 자연환경은 생활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형성한다.

역사
900여 년 전 송나라 때만 해도 선전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조그마한 도시였다. 송나라가 망한 후 송왕을 따라 내려온 남은 백성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선전만 일대를 떠돌며 타향살이를 하게 됐는데 이때부터 이들은 커쟈런(客家人; 나그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선전은 이민자들의 도시가 되었다. 80년대 이후 사방에서 모여든 외지인들은 선전을 떠돌며 온갖 어려움에도 열정적으로 사업을 일궈내 새로운 선전인으로 거듭나고 있다.

기독교 상황
특구 내에는 󰡐션쩐기독교회󰡑라는 교회 하나만 있고, 시외지역에는 5~6개의 교회가 있다. 이중 특구 내에 5,600명의 삼자교회 신도가 있다.
  이 젊음의 도시 선전에는 정말로 많은 청년들이 단지 돈을 벌기 위해 각 곳에서 몰려온다. 그래서 공단의 곳곳에는 이미 소비적이고 향락적인 문화들이 만연되어 있다. 고층빌딩이 숲을 이루고 홍콩과 같이 패션이 유행하는 거리의 모습과 깨끗하고 발달된 거리인 이곳을 아무도 중국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분명 갈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불분명하여 마음이 가난하니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오히려 쉽고,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에 이들을 전도하고 훈련시키면 전국가지에 복음을 전할 수도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환경은 최소 12시간 이상 일해야 하는 매우 열악한 근무여건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과중된 업무로 늘 피곤해 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각 공장 대표의 승인이 없이는 복음을 전하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