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점을 바라보고
빌3:12-16
(2011/5/29)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숙한 사람은 이와같이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여러분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어느 단계에 도달했든지 그 단계에 맞추어서 행합시다.]

• 바울의 소망
주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제가 처음 교회에 나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청년부를 담당하던 목사님께서 제게 책 한 권을 건네주셨습니다.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의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이라는 책이었는데, 중학교 때 무협지를 섭렵했던 저는 그게 서양 사람이 쓴 무협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크리스천이라는 사람이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마침내 하늘 도성에 당도하는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어찌 보면 영웅서사를 닮은 듯 보였지만 제게 그 책은 신앙생활은 자기와의 싸움이고 온갖 유혹과 시련을 견뎌내야 하는 과정임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은 바울 사도의 영적인 자서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1절부터 11절까지는 바울이 주님을 영접하여 새 사람이 되기까지의 내적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12절부터 16절까지는 신앙 여정 가운데 오늘이라는 시간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고백적으로 들려줍니다. 17절부터 21절까지는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를 가르치면서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흘러와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흐르는 것입니다. 시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인 동시에 사랑으로 채워가야 할 소중한 소명의 장입니다. 우리는 살라는 명령을 받고 이 세상에 왔지만 어떻게 살라는 명령은 받은 바 없기에 언제나 주님의 뜻을 여쭤보면서 조심스럽게 살아가야 합니다. 늘 선을 행하지는 못한다 해도 최소한 다른 이들이나 생태계에 해를 입히지는 말아야 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에게는 기쁨이 되고 이웃들에게는 덕이 되도록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의 있음이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 되도록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윤리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분명한 지향점입니다. 빌립보서 3장 10-11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심으로 바라는 바를 몇 가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안다’는 단어는 그리스도에 대한 정보를 안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앎이란 앎의 대상과 온전히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요14:11a)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다는 것은 상호 내주를 뜻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심정과 생각 그리고 관점이 주님과 온전히 일치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둘째, 부활의 능력을 깨닫는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넘어섬입니다. 죽음의 자리를 딛고 일어섬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온전한 신뢰에 자기를 맡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다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바울 사도에게 예수를 믿는 보람은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도, 물질적 복을 누리는 것도,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겪으셨던 그 고난에 자발적으로 뛰어들어 새로운 세상을 낳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와 만나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맛본 사람의 꿈입니다.

• 길 위의 인생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도망치고 싶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자기가 이미 그런 자리에 이르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에 흔들림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순례자라는 말입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12)

바울은 우리보다 훨씬 더 큰 은혜를 받았지만 여전히 옛 사람의 인력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정직합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잘 압니다. 오랜 세월 몸과 마음에 밴 습성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음을 압니다. 모욕을 당하면 마음은 웃으려 해도 낯빛이 흔들리고, 부드럽고 친절하게 응대하려 해도 말투가 날카로워집니다. 이게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우리의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고 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가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마땅히 가야 할 곳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한 번 밖에 없는 이 인생길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가 분명하다면 넘어지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목표가 가물거린다는 것입니다. 수십 년, 아니 평생 교회에 다녔으면서도 자기가 가야 할 목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생을 통해 우리가 이루어야 할 목표, 그것은 예수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투, 표정, 몸짓, 마음 씀, 다른 이를 응대하는 태도 등 모든 것이 예수님을 기본음으로 하여 조율되어야 합니다. 이걸 못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물론 육체의 습기習氣를 끊어버리기가 어렵기에 우리는 나 자신과 동료들이 거두는 작은 승리 혹은 진보를 칭찬하고 격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만하면 됐다’ 혹은 ‘내가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좀 낫지’하는 자만심에 빠지는 순간 우리의 영적 진보는 중단되고 맙니다. 나의 부족함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을 구하게 됩니다. 지성이나 의지로도 어찌해 볼 수 없는 나의 못남 때문에 울 때 주님이 우리 곁에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새로 빚어주십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말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머물고 있는 삶의 자리가 얼마나 각박하고 힘겨운지 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와 압력을 받고 있음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방 빼’, 혹은 ‘책상 빼’라는 말이 공포가 되는 이들이 많습니다. 살다보면 달콤한 유혹도 많습니다. 눈 딱 감고 한 번만 절하면 온 천하를 다 주겠노라는 사탄의 유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절망감이 엄습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누구나 겪는 실존의 조건들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가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루카치라는 철학자는 ‘하늘의 별을 보며 길을 가늠하던 시대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땅의 현실만 바라보면 길을 잃게 마련입니다. 하늘을 볼 때 우리는 땅의 현실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잊음
하늘을 바라보며 앞을 향해 나아가려는 우리를 붙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인력’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삶을 원하지만 오랫동안 애착심을 가지고 대해 왔던 헛되고 어리석은 일들이 자기를 꼭 붙들고 놓아주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의 옷자락을 슬쩍 치면서 고요히 ‘당신이 우리를 정말 버리고 떠나가렵니까?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는 당신과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없단 말입니까? 이제부터는 당신이 이런 일 저런 일을 영원히 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라고 속삭였습니다.”(<고백록>, 제8권 26절)

우리를 꼭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습관의 폭력’이라 칭합니다. 그것은 ‘나 없이도 네가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하고 묻습니다. 신앙과 불신앙의 경계에 설 때마다 제기되는 질문입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 버릴 것을 버려야 문지방을 넘을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만 보고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뒤의 것은 습관의 폭력일 수도 있고, 우리를 괴롭히는 아픈 기억 혹은 상처일 수 있습니다. 목표점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버려두고 가야 합니다. 그것을 다 짊어지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습니다. 아무리 후회해 보아도 과거는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의미는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 됩니다.

애굽에 내려온 형들을 처음 보았을 때 요셉의 마음은 뒤틀렸을 겁니다. 자기를 종으로 팔아버린 형들을 대하는 순간 한동안 잊고 살았던 과거의 상처가 떠올라 혼돈스러웠을 겁니다.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추레한 그들의 모습을 보며 측은한 생각도 들었을 겁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요셉의 마음을 붙들고 있던 미움과 아픈 기억이 다소 누그러졌습니다. 그러자 자기가 겪었던 일들이 새롭게 되새겨지기 시작했고, 과거의 상처에서 놓여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마침내 자기의 정체를 형들에게 드러냅니다.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당혹스러워하는 형들에게 요셉은 자기 집안에서 벌어진 그 고통스런 일들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가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이곳으로 앞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자 과거는 돌연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살다 보면 가까운 사이에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상처를 주고받고, 감정적으로 얽히고, 거리감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책임 소재를 가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이에 하나님을 모시는 일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함께 더 높은 곳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목표가 앞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 걸림돌을 넘어
바울 사도는 앞의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참 역동적인 모습입니다. 단거리 경주에서 결승점을 앞둔 선수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몸을 앞으로 쭉 내밉니다. 그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꼴찌로 들어온 선수라 하여 나무랄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힘을 다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러할 것입니다. 포도원 일꾼들이 몇 시간 일했느냐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기 않고 그들의 필요에 따라 임금을 지급한 주인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한 일의 양을 가지고 우리를 평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이전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깨어 있는가?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고,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꾸준함이고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의 참 일꾼은 냄비처럼 쉽게 달아오르는 사람이 아니라, 무쇠솥같이 서서히 달아오르지만 쉽게 식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짜릿함을 구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어떤 활동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의 요체는 존재의 변화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파악했던 사람이 남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 편협할 뿐 아니라 자기도취에 빠져 살던 사람이 남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 자기의 의를 주장하며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최우선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보람입니다.

진리에의 오름길은 홀로는 걸을 수 없는 길입니다. 반드시 동료가 필요합니다. 내가 넘어지면 일으켜주고, 뒤처지면 기다려주고, 비틀거리면 부축해주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약한 이들, 고통 받는 이들, 외로운 이들을 외면하고는 갈 수 없는 길이 진리의 길입니다. 세계화라는 잔인한 짐승에게 물어뜯겨 더욱 가난해진 사람들, 설 자리를 잃어버려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이야말로 기독교인들이 품어주어야 할 소중한 이웃들입니다. 우리는 또한 미군에 의해 이 땅 곳곳에 묻혀 있는 맹독성 독극물에 오염된 땅의 신음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 땅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변화입니다.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기독교인으로 살기 원한다면 무엇보다 허세를 버리십시오. 자기의 무력함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울면서라도 하나님의 일에 뛰어드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목표점을 향해 나아가는 오름길은 겸손과 헌신이라는 내림길을 거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모두 예수적 존재라는 목표점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새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옛 사람의 옷을 벗어버리고, 진리와 평화와 생명의 옷으로 갈아입은 새 사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목표점을 바라보고
빌3:12-16
(2011/5/29)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숙한 사람은 이와같이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여러분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어느 단계에 도달했든지 그 단계에 맞추어서 행합시다.]

• 바울의 소망
주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제가 처음 교회에 나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청년부를 담당하던 목사님께서 제게 책 한 권을 건네주셨습니다.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의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이라는 책이었는데, 중학교 때 무협지를 섭렵했던 저는 그게 서양 사람이 쓴 무협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크리스천이라는 사람이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마침내 하늘 도성에 당도하는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어찌 보면 영웅서사를 닮은 듯 보였지만 제게 그 책은 신앙생활은 자기와의 싸움이고 온갖 유혹과 시련을 견뎌내야 하는 과정임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은 바울 사도의 영적인 자서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1절부터 11절까지는 바울이 주님을 영접하여 새 사람이 되기까지의 내적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12절부터 16절까지는 신앙 여정 가운데 오늘이라는 시간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고백적으로 들려줍니다. 17절부터 21절까지는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를 가르치면서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흘러와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흐르는 것입니다. 시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인 동시에 사랑으로 채워가야 할 소중한 소명의 장입니다. 우리는 살라는 명령을 받고 이 세상에 왔지만 어떻게 살라는 명령은 받은 바 없기에 언제나 주님의 뜻을 여쭤보면서 조심스럽게 살아가야 합니다. 늘 선을 행하지는 못한다 해도 최소한 다른 이들이나 생태계에 해를 입히지는 말아야 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에게는 기쁨이 되고 이웃들에게는 덕이 되도록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의 있음이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 되도록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윤리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분명한 지향점입니다. 빌립보서 3장 10-11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심으로 바라는 바를 몇 가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안다’는 단어는 그리스도에 대한 정보를 안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앎이란 앎의 대상과 온전히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요14:11a)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다는 것은 상호 내주를 뜻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심정과 생각 그리고 관점이 주님과 온전히 일치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둘째, 부활의 능력을 깨닫는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넘어섬입니다. 죽음의 자리를 딛고 일어섬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온전한 신뢰에 자기를 맡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다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바울 사도에게 예수를 믿는 보람은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도, 물질적 복을 누리는 것도,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겪으셨던 그 고난에 자발적으로 뛰어들어 새로운 세상을 낳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와 만나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맛본 사람의 꿈입니다.

• 길 위의 인생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도망치고 싶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자기가 이미 그런 자리에 이르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에 흔들림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순례자라는 말입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12)

바울은 우리보다 훨씬 더 큰 은혜를 받았지만 여전히 옛 사람의 인력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정직합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잘 압니다. 오랜 세월 몸과 마음에 밴 습성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음을 압니다. 모욕을 당하면 마음은 웃으려 해도 낯빛이 흔들리고, 부드럽고 친절하게 응대하려 해도 말투가 날카로워집니다. 이게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우리의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고 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가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마땅히 가야 할 곳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한 번 밖에 없는 이 인생길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가 분명하다면 넘어지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목표가 가물거린다는 것입니다. 수십 년, 아니 평생 교회에 다녔으면서도 자기가 가야 할 목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생을 통해 우리가 이루어야 할 목표, 그것은 예수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투, 표정, 몸짓, 마음 씀, 다른 이를 응대하는 태도 등 모든 것이 예수님을 기본음으로 하여 조율되어야 합니다. 이걸 못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물론 육체의 습기習氣를 끊어버리기가 어렵기에 우리는 나 자신과 동료들이 거두는 작은 승리 혹은 진보를 칭찬하고 격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만하면 됐다’ 혹은 ‘내가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좀 낫지’하는 자만심에 빠지는 순간 우리의 영적 진보는 중단되고 맙니다. 나의 부족함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을 구하게 됩니다. 지성이나 의지로도 어찌해 볼 수 없는 나의 못남 때문에 울 때 주님이 우리 곁에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새로 빚어주십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말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머물고 있는 삶의 자리가 얼마나 각박하고 힘겨운지 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와 압력을 받고 있음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방 빼’, 혹은 ‘책상 빼’라는 말이 공포가 되는 이들이 많습니다. 살다보면 달콤한 유혹도 많습니다. 눈 딱 감고 한 번만 절하면 온 천하를 다 주겠노라는 사탄의 유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절망감이 엄습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누구나 겪는 실존의 조건들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가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루카치라는 철학자는 ‘하늘의 별을 보며 길을 가늠하던 시대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땅의 현실만 바라보면 길을 잃게 마련입니다. 하늘을 볼 때 우리는 땅의 현실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잊음
하늘을 바라보며 앞을 향해 나아가려는 우리를 붙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인력’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삶을 원하지만 오랫동안 애착심을 가지고 대해 왔던 헛되고 어리석은 일들이 자기를 꼭 붙들고 놓아주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의 옷자락을 슬쩍 치면서 고요히 ‘당신이 우리를 정말 버리고 떠나가렵니까?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는 당신과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없단 말입니까? 이제부터는 당신이 이런 일 저런 일을 영원히 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라고 속삭였습니다.”(<고백록>, 제8권 26절)

우리를 꼭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습관의 폭력’이라 칭합니다. 그것은 ‘나 없이도 네가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하고 묻습니다. 신앙과 불신앙의 경계에 설 때마다 제기되는 질문입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 버릴 것을 버려야 문지방을 넘을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만 보고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뒤의 것은 습관의 폭력일 수도 있고, 우리를 괴롭히는 아픈 기억 혹은 상처일 수 있습니다. 목표점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버려두고 가야 합니다. 그것을 다 짊어지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습니다. 아무리 후회해 보아도 과거는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의미는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 됩니다.

애굽에 내려온 형들을 처음 보았을 때 요셉의 마음은 뒤틀렸을 겁니다. 자기를 종으로 팔아버린 형들을 대하는 순간 한동안 잊고 살았던 과거의 상처가 떠올라 혼돈스러웠을 겁니다.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추레한 그들의 모습을 보며 측은한 생각도 들었을 겁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요셉의 마음을 붙들고 있던 미움과 아픈 기억이 다소 누그러졌습니다. 그러자 자기가 겪었던 일들이 새롭게 되새겨지기 시작했고, 과거의 상처에서 놓여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마침내 자기의 정체를 형들에게 드러냅니다.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당혹스러워하는 형들에게 요셉은 자기 집안에서 벌어진 그 고통스런 일들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가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이곳으로 앞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자 과거는 돌연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살다 보면 가까운 사이에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상처를 주고받고, 감정적으로 얽히고, 거리감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책임 소재를 가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이에 하나님을 모시는 일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함께 더 높은 곳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목표가 앞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 걸림돌을 넘어
바울 사도는 앞의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참 역동적인 모습입니다. 단거리 경주에서 결승점을 앞둔 선수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몸을 앞으로 쭉 내밉니다. 그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꼴찌로 들어온 선수라 하여 나무랄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힘을 다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러할 것입니다. 포도원 일꾼들이 몇 시간 일했느냐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기 않고 그들의 필요에 따라 임금을 지급한 주인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한 일의 양을 가지고 우리를 평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이전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깨어 있는가?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고,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꾸준함이고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의 참 일꾼은 냄비처럼 쉽게 달아오르는 사람이 아니라, 무쇠솥같이 서서히 달아오르지만 쉽게 식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짜릿함을 구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어떤 활동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의 요체는 존재의 변화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파악했던 사람이 남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 편협할 뿐 아니라 자기도취에 빠져 살던 사람이 남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 자기의 의를 주장하며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최우선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보람입니다.

진리에의 오름길은 홀로는 걸을 수 없는 길입니다. 반드시 동료가 필요합니다. 내가 넘어지면 일으켜주고, 뒤처지면 기다려주고, 비틀거리면 부축해주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약한 이들, 고통 받는 이들, 외로운 이들을 외면하고는 갈 수 없는 길이 진리의 길입니다. 세계화라는 잔인한 짐승에게 물어뜯겨 더욱 가난해진 사람들, 설 자리를 잃어버려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이야말로 기독교인들이 품어주어야 할 소중한 이웃들입니다. 우리는 또한 미군에 의해 이 땅 곳곳에 묻혀 있는 맹독성 독극물에 오염된 땅의 신음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 땅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변화입니다.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기독교인으로 살기 원한다면 무엇보다 허세를 버리십시오. 자기의 무력함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울면서라도 하나님의 일에 뛰어드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목표점을 향해 나아가는 오름길은 겸손과 헌신이라는 내림길을 거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모두 예수적 존재라는 목표점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새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옛 사람의 옷을 벗어버리고, 진리와 평화와 생명의 옷으로 갈아입은 새 사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목표점을 바라보고
빌3:12-16
(2011/5/29)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숙한 사람은 이와같이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여러분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어느 단계에 도달했든지 그 단계에 맞추어서 행합시다.]

• 바울의 소망
주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제가 처음 교회에 나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청년부를 담당하던 목사님께서 제게 책 한 권을 건네주셨습니다.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의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이라는 책이었는데, 중학교 때 무협지를 섭렵했던 저는 그게 서양 사람이 쓴 무협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크리스천이라는 사람이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마침내 하늘 도성에 당도하는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어찌 보면 영웅서사를 닮은 듯 보였지만 제게 그 책은 신앙생활은 자기와의 싸움이고 온갖 유혹과 시련을 견뎌내야 하는 과정임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은 바울 사도의 영적인 자서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1절부터 11절까지는 바울이 주님을 영접하여 새 사람이 되기까지의 내적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12절부터 16절까지는 신앙 여정 가운데 오늘이라는 시간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고백적으로 들려줍니다. 17절부터 21절까지는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를 가르치면서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흘러와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흐르는 것입니다. 시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인 동시에 사랑으로 채워가야 할 소중한 소명의 장입니다. 우리는 살라는 명령을 받고 이 세상에 왔지만 어떻게 살라는 명령은 받은 바 없기에 언제나 주님의 뜻을 여쭤보면서 조심스럽게 살아가야 합니다. 늘 선을 행하지는 못한다 해도 최소한 다른 이들이나 생태계에 해를 입히지는 말아야 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에게는 기쁨이 되고 이웃들에게는 덕이 되도록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의 있음이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 되도록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윤리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분명한 지향점입니다. 빌립보서 3장 10-11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심으로 바라는 바를 몇 가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안다’는 단어는 그리스도에 대한 정보를 안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앎이란 앎의 대상과 온전히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요14:11a)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다는 것은 상호 내주를 뜻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심정과 생각 그리고 관점이 주님과 온전히 일치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둘째, 부활의 능력을 깨닫는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넘어섬입니다. 죽음의 자리를 딛고 일어섬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온전한 신뢰에 자기를 맡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다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바울 사도에게 예수를 믿는 보람은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도, 물질적 복을 누리는 것도,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겪으셨던 그 고난에 자발적으로 뛰어들어 새로운 세상을 낳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와 만나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맛본 사람의 꿈입니다.

• 길 위의 인생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도망치고 싶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자기가 이미 그런 자리에 이르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에 흔들림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순례자라는 말입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12)

바울은 우리보다 훨씬 더 큰 은혜를 받았지만 여전히 옛 사람의 인력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정직합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잘 압니다. 오랜 세월 몸과 마음에 밴 습성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음을 압니다. 모욕을 당하면 마음은 웃으려 해도 낯빛이 흔들리고, 부드럽고 친절하게 응대하려 해도 말투가 날카로워집니다. 이게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우리의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고 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가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마땅히 가야 할 곳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한 번 밖에 없는 이 인생길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가 분명하다면 넘어지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목표가 가물거린다는 것입니다. 수십 년, 아니 평생 교회에 다녔으면서도 자기가 가야 할 목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생을 통해 우리가 이루어야 할 목표, 그것은 예수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투, 표정, 몸짓, 마음 씀, 다른 이를 응대하는 태도 등 모든 것이 예수님을 기본음으로 하여 조율되어야 합니다. 이걸 못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물론 육체의 습기習氣를 끊어버리기가 어렵기에 우리는 나 자신과 동료들이 거두는 작은 승리 혹은 진보를 칭찬하고 격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만하면 됐다’ 혹은 ‘내가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좀 낫지’하는 자만심에 빠지는 순간 우리의 영적 진보는 중단되고 맙니다. 나의 부족함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을 구하게 됩니다. 지성이나 의지로도 어찌해 볼 수 없는 나의 못남 때문에 울 때 주님이 우리 곁에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새로 빚어주십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말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머물고 있는 삶의 자리가 얼마나 각박하고 힘겨운지 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와 압력을 받고 있음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방 빼’, 혹은 ‘책상 빼’라는 말이 공포가 되는 이들이 많습니다. 살다보면 달콤한 유혹도 많습니다. 눈 딱 감고 한 번만 절하면 온 천하를 다 주겠노라는 사탄의 유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절망감이 엄습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누구나 겪는 실존의 조건들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가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루카치라는 철학자는 ‘하늘의 별을 보며 길을 가늠하던 시대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땅의 현실만 바라보면 길을 잃게 마련입니다. 하늘을 볼 때 우리는 땅의 현실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잊음
하늘을 바라보며 앞을 향해 나아가려는 우리를 붙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인력’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삶을 원하지만 오랫동안 애착심을 가지고 대해 왔던 헛되고 어리석은 일들이 자기를 꼭 붙들고 놓아주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의 옷자락을 슬쩍 치면서 고요히 ‘당신이 우리를 정말 버리고 떠나가렵니까?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는 당신과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없단 말입니까? 이제부터는 당신이 이런 일 저런 일을 영원히 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라고 속삭였습니다.”(<고백록>, 제8권 26절)

우리를 꼭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습관의 폭력’이라 칭합니다. 그것은 ‘나 없이도 네가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하고 묻습니다. 신앙과 불신앙의 경계에 설 때마다 제기되는 질문입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 버릴 것을 버려야 문지방을 넘을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만 보고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뒤의 것은 습관의 폭력일 수도 있고, 우리를 괴롭히는 아픈 기억 혹은 상처일 수 있습니다. 목표점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버려두고 가야 합니다. 그것을 다 짊어지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습니다. 아무리 후회해 보아도 과거는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의미는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 됩니다.

애굽에 내려온 형들을 처음 보았을 때 요셉의 마음은 뒤틀렸을 겁니다. 자기를 종으로 팔아버린 형들을 대하는 순간 한동안 잊고 살았던 과거의 상처가 떠올라 혼돈스러웠을 겁니다.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추레한 그들의 모습을 보며 측은한 생각도 들었을 겁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요셉의 마음을 붙들고 있던 미움과 아픈 기억이 다소 누그러졌습니다. 그러자 자기가 겪었던 일들이 새롭게 되새겨지기 시작했고, 과거의 상처에서 놓여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마침내 자기의 정체를 형들에게 드러냅니다.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당혹스러워하는 형들에게 요셉은 자기 집안에서 벌어진 그 고통스런 일들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가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이곳으로 앞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자 과거는 돌연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살다 보면 가까운 사이에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상처를 주고받고, 감정적으로 얽히고, 거리감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책임 소재를 가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이에 하나님을 모시는 일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함께 더 높은 곳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목표가 앞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 걸림돌을 넘어
바울 사도는 앞의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참 역동적인 모습입니다. 단거리 경주에서 결승점을 앞둔 선수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몸을 앞으로 쭉 내밉니다. 그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꼴찌로 들어온 선수라 하여 나무랄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힘을 다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러할 것입니다. 포도원 일꾼들이 몇 시간 일했느냐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기 않고 그들의 필요에 따라 임금을 지급한 주인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한 일의 양을 가지고 우리를 평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이전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깨어 있는가?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고,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꾸준함이고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의 참 일꾼은 냄비처럼 쉽게 달아오르는 사람이 아니라, 무쇠솥같이 서서히 달아오르지만 쉽게 식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짜릿함을 구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어떤 활동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의 요체는 존재의 변화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파악했던 사람이 남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 편협할 뿐 아니라 자기도취에 빠져 살던 사람이 남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 자기의 의를 주장하며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최우선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보람입니다.

진리에의 오름길은 홀로는 걸을 수 없는 길입니다. 반드시 동료가 필요합니다. 내가 넘어지면 일으켜주고, 뒤처지면 기다려주고, 비틀거리면 부축해주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약한 이들, 고통 받는 이들, 외로운 이들을 외면하고는 갈 수 없는 길이 진리의 길입니다. 세계화라는 잔인한 짐승에게 물어뜯겨 더욱 가난해진 사람들, 설 자리를 잃어버려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이야말로 기독교인들이 품어주어야 할 소중한 이웃들입니다. 우리는 또한 미군에 의해 이 땅 곳곳에 묻혀 있는 맹독성 독극물에 오염된 땅의 신음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 땅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변화입니다.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기독교인으로 살기 원한다면 무엇보다 허세를 버리십시오. 자기의 무력함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울면서라도 하나님의 일에 뛰어드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목표점을 향해 나아가는 오름길은 겸손과 헌신이라는 내림길을 거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모두 예수적 존재라는 목표점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새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옛 사람의 옷을 벗어버리고, 진리와 평화와 생명의 옷으로 갈아입은 새 사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청파교회 김기석 선생님의 말씀입니다)